▌세이브 스탯의 허상: 세이버메트릭스로 본 구원투수의 진짜 가치
야구 팬들에게 '세이브(Save)'는 경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짜릿한 순간과 동의어처럼 여겨집니다. 9회말, 팀의 리드를 지키기 위해 마운드에 오르는 마무리 투수의 모습은 영웅적 서사로 포장되곤 하죠. 화려한 등장 음악과 함께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마운드에 올라 경기를 매듭짓는 클로저(Closer)는 팀의 승리를 상징하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많은 팀들이 최고의 구원 투수에게 '마무리' 보직을 맡기고, 세이브 숫자는 그의 가치를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로 사용됩니다. 연봉 협상이나 명예의 전당 입성 논의에서도 세이브 기록은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하지만 과연 세이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투수의 '가치'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지표일까요? 현대 야구의 분석 트렌드인 세이버메트릭스(Sabermetrics)는 이 질문에 고개를 젓습니다. 세이버메트릭스의 관점에서 볼 때, 전통적인 세이브 스탯은 여러 가지 맹점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구원 투수의 실제 기여도를 왜곡하기도 합니다.
세이브 스탯, 무엇이 문제인가?
- 자의적인 규칙과 제한된 상황: 세이브가 기록되는 조건(3점 이하 리드 시 등판하여 리드를 지키고 경기를 끝내는 등)은 다소 인위적입니다. 예를 들어, 3점 차 리드 상황에서 9회에 등판하여 아웃카운트 3개를 잡는 것과, 1점 차 리드 상황에서 8회 1사 만루 위기에 등판하여 불을 끄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려울까요? 대부분 후자를 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세이브 규정상 후자의 투수는 세이브를 기록할 수 없습니다. 세이브는 오직 특정 조건과 '마무리'라는 보직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합니다.
- 상황의 중요도(Leverage) 무시: 세이버메트릭스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개념 중 하나는 '레버리지 인덱스(Leverage Index, LI)'입니다. 이는 특정 상황이 경기의 승패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주자가 없고 점수 차가 넉넉한 상황(낮은 LI)보다, 주자가 득점권에 있고 점수 차가 적은 상황(높은 LI)이 훨씬 중요합니다. 하지만 세이브는 이러한 상황적 중요도를 전혀 구분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1세이브'라도, 경기의 향방을 가르는 결정적인 순간에 기록된 것과 상대적으로 편안한 상황에서 기록된 것의 가치는 천지 차이입니다.
- 감독의 기용 전략에 따른 의존성: 세이브 숫자는 투수의 능력만큼이나 감독의 기용 방식에 크게 좌우됩니다. 감독이 특정 투수를 '마무리 투수'로 낙점하고 세이브 상황에만 투입한다면, 그 투수는 뛰어난 능력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많은 세이브를 쌓을 수 있습니다. 반면, 팀 내 최고의 구원 투수라도 가장 중요한 위기 상황(반드시 9회가 아닐 수 있는)에 먼저 투입되는 '파이어맨(Fireman)' 역할을 맡는다면 세이브 숫자는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세이브는 투수의 순수한 역량보다는 '기회의 산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세이브를 대체할 세이버매트릭스 지표는?
그렇다면 구원 투수의 가치를 어떻게 더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세이버매트릭스는 다음과 같은 대안 지표들을 제시합니다.
- 승리 확률 기여도 (Win Probability Added, WPA): WPA는 특정 플레이나 투수의 등판 전후로 팀의 예상 승리 확률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측정합니다. 극적인 위기 상황을 막아낸 투수는 WPA가 크게 상승하는 반면, 큰 점수 차에서 의미 없는 아웃카운트를 잡는 것은 WPA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이는 투수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활약했는지를 직접적으로 반영하여 실제 승리 기여도를 보여줍니다.
- 상황 중요도 지수 (Leverage Index, LI): 앞서 언급했듯이 LI는 투수가 등판한 상황의 중요도를 나타냅니다. 팀들은 최고의 구원 투수를 가장 높은 LI 상황에 투입하기를 원합니다. 투수가 평균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상황에 등판했는지(pLI), 그리고 그 상황에서 얼마나 잘 던졌는지를 함께 평가하면 좋습니다. 유독 높은 LI 상황에서 낮은 피안타율과 높은 탈삼진율을 나타내는 투수라면 강심장을 가진 것으로 봐도 되겠죠.
- 셧다운(Shutdown, SD) / 멜트다운(Meltdown, MD): 팬그래프닷컴 등에서 사용하는 지표로, WPA를 기반으로 등판 결과를 평가합니다. 등판하여 팀의 승리 확률을 크게 높인 경우(WPA +0.06 이상) '셧다운', 반대로 크게 낮춘 경우(WPA -0.06 이하) '멜트다운'으로 기록됩니다. 이는 세이브처럼 결과론 적이긴 하지만, 승리 확률이라는 더 객관적인 잣대를 사용하여 투수의 안정성과 영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합니다.
- 이닝 기반 및 비율 스탯 (FIP, K/9, BB/9 등): FIP(수비 무관 평균자책점), K/9(9이닝당 탈삼진), BB/9(9이닝당 볼넷 허용) 등은 투수 본연의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세이브 상황이든 아니든, 꾸준히 낮은 FIP와 높은 탈삼진 비율, 낮은 볼넷 비율을 기록하는 투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좋은 투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낮은 평균자책점과 적은 블론세이브 갯수: 클래식 스탯의 측면에서도 한 시즌을 운영할 때 마무리 투수가 평균자책점이 3.7이 넘고 블론세이브 개수가 7개가 넘어간다면 직관적으로도 좋은 마무리 투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이브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물론 세이브가 주는 극적인 매력과 상징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대 야구 분석의 관점에서 세이브는 구원 투수의 실제 가치와 승리 기여도를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많은 '구시대적' 지표에 가깝습니다. 이미 많은 메이저리그 팀들은 단순히 세이브 숫자가 많은 투수에게 마무리 보직을 맡기기보다, WPA나 LI 같은 데이터를 활용하여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믿을 수 있는 투수를 투입하는 유연한 불펜 운영 전략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팬들 역시 세이브 숫자에만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적절한 세이버매트릭스 지표를 통해 어떤 구원 투수가 정말로 팀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야구를 더욱 깊이 있게 즐기는 방법일 것입니다. 세이브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구원 투수의 진짜 가치를 발견하는 눈, 그것이 바로 현대 야구를 즐기는 새로운 기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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